중세 일본 시대에 유럽과 이어져 있었던 아리마의 나라. 남만무역과 예수회의 후원을 통하여 세력을 확보하고, 자국 영지의 부를 이룩하고 있었습니다.
‘아름답게 장식된 길을 오르간의 반주에 맞추어 찬송가를 부르며 세미나리오의 생도들이 걷는다’ … 예수회연보 속의 묘사에서도 당시의 아리마 지역의 화려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16세기 중엽, 일본은 전국시대라고 불리는 전란의 세상이었습니다. 시마바라 반도와 히젠 일대의 영주였던 ‘아리마 요시사다’는, 큐슈 각지에서 활발하였던 남만무역을 자신의 영지에서도 추진하기 위하여 선교사들을 초청하고자 하였습니다. 당시의 남만무역은 크리스트교와 불가분의 관계였습니다. 그리하여 1563년, 예수회의 선교사 ‘루이스 데 알메이다’가 쿠치노츠에 도착하였고, 시마바라 반도에서의 포교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시기, 사가의 ‘류조우지 타카노부’가 세력을 키워, 아리마의 영토를 위협하고 있었고, 또 영내에서는 크리스트교 배척 움직임도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역경에 직면하면서도 요시사다는 예수회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며, 남만무역의 실현에 힘을 쏟았습니다. 고난 끝에 드디어 포르투갈의 배를 쿠치노츠항에 입항시킨 것이 1567년. 알메이다가 아리마의 땅에 들어온 지 4년만의 일이었습니다.
‘아리마 요시즈미’ 로부터 가독을 물려받은 ‘아리마 하루노부’ 는 점점 더 강대해져 가는 류조우지 타카노부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선교사와 남만무역을 통하여 군사, 경제력을 강화하고자 하였습니다. 1579년에 포르투갈의 배를 타고 일본으로 온 예수회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는 그러한 움직임에 편승하여 영내에서의 한층 더 강화된 포교활동을 요구하였습니다. 하루노부는 자진해서 세례를 받아 ‘돈 프로타지오’라는 세례명을 받고, 영내의 백성에게도 적극적으로 신자가 될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그 결과 시마바라 반도에서는 급속히 크리스트교가 퍼져나갔습니다.
1584년에 예수회와 사츠마의 시마즈 가문으로부터의 지원을 받아, 마침내 류조우지 타카노부에게 승리하게 됩니다. 영토를 지켜낸 하루노부는 한층 더 신앙을 키워갑니다. 히노에성의 시가지에는 장엄한 교회와 수도원이 줄지어 세워지고, 일본 최초 예수회의 초등교육기관인 세미나리오도 창립되었습니다. 마을에는 많은 수의 선교사들과 무역상인들이 왕래하고 있었습니다.
아리마 지역에 있어서 크리스트교의 주요한 행사는 예수회의 일본연보에 기재되었고, 로마에 보고되었습니다. 당시의 지역의 대로에는 ‘교회나 세미나리오 뿐만 아니라 아리마의 성 주변 일대에 걸쳐서 도로의 양측에는 깃발이 세워지고 (중략) 아름답게 장식된 길을 오르간의 반주에 맞추어 찬송가를 부르며 세미나리오의 생도들이 걷고 있었다’ 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리마 하루노부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시마즈 가문를 공략하려고 했던 큐슈 평정에서 활약하였고, 임진왜란에도 참가하게 됩니다. 서국의 다이묘로서 확고한 지위를 구축해 감에 따라 지역도 발전해 갔습니다. 이에 더하여 하루노부의 아들 ‘아리마 나오즈미’가 도쿠가와 가문과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금교의 시대였음에 불구하고 일본에서 가장 호화로운 교회를 건설하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이렇듯 예수회의 연보에 칭송되며 열거된 아리마의 지역의 모습들은, 400년이 흐른 지금에는 볼 수 없습니다. 히노에성도 또한 얼핏 보면 높직한 언덕과 같은 분위기만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1998년 히노에성 발굴조사에 의하여, 지난날의 가장 중요한 단서를 엿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금박기와가 출토된 것입니다. 이 금박기와는 당시의 유력한 다이묘들에게만 허락되었던 것으로 아리마 가문의 힘을 나타내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1582년 아리마의 세미나리오에서 교육을 받은 4명의 소년이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일본 최초의 유럽방문단 ‘천정견구소년사절’ 입니다. 그들은 유럽에서 대환영을 받았고, 로마교황을 알현하는 등 위업을 달성하였습니다. 그들을 본 유럽 사람들은 미지의 나라 일본의 정보를 정리하여 남기고자 하였습니다.
그 결과 ‘Rima seu Arima R(리마 또는 아리마 왕국)’ 이라고 표기된 세계지도 등이 그려지고,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틀림없이 아리마의 지역은 유럽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네 소년과 예수회의 순찰사 발리냐노가 아리마에 의기양양하게 돌아왔을 때의 기록도 예수회의 연보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 ‘어느 날 (아리마 하루노부는) 식사를 마치고 순찰사와 돈 미구엘, 그 외의 공자들(천정견구소년사절)을 저택으로 안내하였다. 저택은 얼마 전 막 공사가 완료되어 아직 누구에게도 공개되지 않았다. (중략) 크고 작은 방들은 모두 황금으로 만든 물건들과 우아하고 화려한 회화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 저택은 최근 그(하루노부)에 의하여 지어졌으며, 훌륭한 솜씨로 만들어진 성곽 안에 있다’
히노에성 혼마루*터에 올라, 눈 아래로 펼쳐지는 지역을 앞에 두고 가만히 눈을 감으면 … 교회의 종이 울리며, 오르간의 연주가 들리고, 세미나리오의 생도들이 찬송가를 부른다 … 라고 묘사되었던 400년 전의 풍경이 떠오르는 듯 합니다. 아리마-미나미시마바라는 전국시대의 크리스트교의 전래와 번영을 오늘날에 전하는, 대단히 매혹적인 지역인 것입니다. ※성의 중심이 되는 건물을 이르는 말. 보통 중앙에 천수각이 세워지고 둘레에 해자가 있는 형태. 본성, 아성이라고도 불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