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아리마의 세미나리오에서 배운 4명의 소년이 로마로 여행을 떠난다. … 이 너무도 장대한 프로젝트에 있어서 그들이 짊어진 기대와 책임은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요?
유럽 각지에서 열렬히 환영 받고, 로마교황 알현을 이뤄내고, 더하여 활판인쇄기를 가지고 돌아오는 등 다수의 위업을 이루어낸 소년들. 그러나 8년 반에 이르는 긴 여행 끝에 그들이 되돌아온 일본은 … 비운의 금교령의 시대에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1582년 한 척의 포르투갈의 배가 나가사키항에서 출항하였습니다. 승선하고 있던 사람들은 4명의 소년과 예수회의 순찰사 발리냐노. 일본 최초의 유럽방문단 ‘천정견구소년사절’ 입니다. 항해의 목적은 로마교황과 스페인, 포르투갈 양국 왕에게 포교의 원조를 요청하는 것, 그리고 소년들에게 유럽의 크리스트교 세계의 위대함을 피부로 느끼게 하여, 일본에서의 포교에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큐슈의 크리스천 다이묘인 아리마 하루노부, 오오무라 스미타다, 오오토모 소우린의 대리인으로서 4명의 소년, 이토우 만치오(伊東Mancio), 치지와 미구엘(千々石 Miguel), 나카우라 쥴리아(中浦Julião), 하라 말티노(原 Martinão)에게 대임무가 맡겨지게 됩니다. 그들은 아리마의 세미나리오에서 크리스트교를 시작으로 지리학, 천문학, 서양음악, 라틴어 등을 배운 우수한 소년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고작 13~14세의 소년인 것에 변함은 없습니다. 목숨을 건 대항해는 너무도 불안한 것이었겠죠.
아니나 다를까 인도양에서 폭풍우를 만나고 열대지역에서 열병에 걸리는 등 항해는 고난의 극치였습니다. 사절 일행은 인도 및 남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도착한 것은 1584년 8월, 실로 출발로부터 2년 6개월이 지나 있었습니다. 일행의 방문은 유럽 각국에서 놀라움과 환영으로 이어졌고, 스페인의 펠리페2세를 비롯하여 행선지의 국왕과 영주들에게 환대를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소년들은 지성 넘치는 언행으로 회답하여 유럽인들을 감탄시켰다고 합니다. 그 후 일행은 로마로 가서 교황 그레고리오13세와의 알현에 임하였습니다.
알현장은 성 피에로 대성당. 마침 추기경 회의가 열리고 있었기에 소년들에 대한 대우는 흡사 국왕사절을 맞아들이는 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교황은 83세의 고령이었지만, 일본으로부터의 방문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소년 한 명 한 명을 안아주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분명 더 없이 행복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 때 나카우라 쥴리아는 고열로 인하여 알현에 참여하지 못하였지만, 이를 걱정을 한 교황이 일부러 마차를 보내어 다시 알현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레고리오 13세는 선종하였기에 새로운 교황에 식스토 5세가 즉위 하였습니다. 로마에서는 축복의 퍼레이드가 열렸고 4명의 소년은 거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바티칸 도서관에는 한 장의 벽화가 있습니다. 식스토5세 즉위의 퍼레이드를 그린 이 벽화에는 4명의 소년이 그려져 있습니다. 말에 타서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소년들. 행렬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크게 환호성을 외치고 있습니다. 소년들은 밝고 명랑한 미소로 답하며, ‘이 광경을 일본인들에게 전해야 해 …’라고 강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큰 임무를 마치고 사절 일행은 로마를 출발해서 돌아오는 길에 올랐지만, 아직도 들르는 곳곳마다의 열광적인 환영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천정견구소년사절을 통하여 유럽에 일본을 알린다는 발리냐노의 의도는 훌륭하게 달성된 것입니다.
1586년 4월 12일, 마침내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출항한 일행은 도중에 강풍에 주 돛대가 부러지는 등의 사고를 겪습니다. 그런 사고들을 견디며 인도의 고아에서 부왕의 사자가 되어 있던 발리냐노와 재회한 후 항해를 이어갑니다. 그리고 나가사키항에 도착한 때가 1590년 7월. 실로 8년 반에 달하는 긴 여행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 때 사절을 파견한 오오무라 스미타다, 오오토모 소우린은 이미 타계하였고, 생존해 있던 이는 아리마 하루노부 단 한 명뿐 이었습니다. 귀국한 하루노부는 4명의 소년을 따뜻하게 맞아들였고, 이듬해에는 쿄토의 쥬라쿠다이(聚楽第)에서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알현하게 됩니다.
당시의 일본에 있어서 대정견구소년사절의 파견은 터무니없이 장대한 프로젝트였습니다. 파견은 크리스천 다이묘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순찰사 발리냐노의 독단적인 것이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만, 그 역사적 가치가 퇴색되지는 않습니다. 당시의 유럽에 처음으로 일본이라는 나라를 알렸고, 더하여 활판인쇄기 등 서양의 선진적인 기술과 문화를 일본으로 가져온 것 … 이 모든 것을 출발 당시 고작 13~14세였던 세미나리오의 소년들이 이루어내었던 것입니다.
유럽에서는 방대한 수의 서적과 책자가 발간되어 그들의 행적이 전해졌습니다. 400년이 흐른 지금에도 새롭게 발견되는 자료들이 끊이지 않고 있고, 유럽 사회에서 당시의 충격이 얼마나 컸던가를 보여줍니다. 소년들의 여행은 역사의 바다를 넘어, 지금까지도 우리들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