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마 하루노부가 예수회에 기증한 우라카미에서는 금교의 시대에 들어서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계승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막부시대에서 메이지 시대의 시작에 걸쳐 신도발견과 ‘우라카미 네번째 붕괴’ 등 종교사상 중요한 사건에 연속하여 일어났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크리스트교 금교령의 포고문 철거에 의해 신앙의 자유를 얻은 것도 잠시, 최대의 비극은 쇼와시대에 들어서 일어나게 됩니다. …
예전 아리마의 영지였고, 아리마 하루노부가 예수회에 기증한 우라카미 지역은 뿌리 깊은 크리스트교 신앙의 마을이 되었습니다. 나가사키의 6개 지역도 예수회의 영지가 되어, 다수의 교회가 지어지고 신앙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그 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파드레이 추방령을 내리고, 나가사키와 우라카미를 몰수합니다. 선교사는 추방되고, 교회는 파괴되어 갑니다. 1596년에는 쿄토에서 붙잡힌 선교사와 일본인 신도 26명이 나가사키로 보내져, 니시자카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리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26명 중에는 루도비코 이바라키라는 아직 12살 밖에 안된 어린 소년도 있었습니다. 처형을 앞두고 이 어린 소년을 구하고자 했던 한 관리가 ‘여기에서 신앙을 버리거라. 목숨을 구할 수 있단다’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루도비코 이바라키는 신앙을 버리면 천국에 갈 수 없다며 거부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저의 십자가는 어느 것인가요?’라고 말하며 작은 자신의 키에 맞춰서 준비되어 있던 십자가로 달려가 ‘파레인(천국), 예수, 마리아’라며 기쁨을 표현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들은 4천 여 명의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양 겨드랑이를 창에 찔려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시대에는 아직 나가사키의 신자들에게 까지는 탄압의 압력이 미치지 않고 있었습니다. 교회도 몇 군데 남아있었고, 신자도 늘어갔으며, 게이초의 금교령이 내려지기 전에는 약 3만 명의 크리스천이 있었다고 합니다.
금교령이 내려진 후 잠복한 선교사와 신자들은 연이어 붙잡혀 600명 이상이 니시자카의 언덕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마을 사람 거의 전원이 크리스천이었던 우라카미에서는 마을의 중심인물의 한 가문 전체를 본보기로서 처형하였습니다.
이러한 탄압을 피하기 위해, 또한 선교사가 없는 중에도 신앙을 계승하기 위해, 우라카미에서는 ‘쵸카타’, ‘미즈카타’, ‘키키야쿠’라는 지도자를 두는 신도조직이 만들어집니다. 신자들은 ‘봉오도리(음력 7월 15일에 추는 윤무, 한국의 강강술래와 유사함)’를 가장하여 기도를 올리는 등 약 250년 간 잠복을 이어가게 됩니다.
시대는 막부 말기까지 흘러 일본과 프랑스 사이에는 일불수호통상조약이 맺어지자 나가사키에는 프랑스인들이 거주하게 됩니다. 그들은 일요일에 예배를 할 수 있는 교회의 건설을 희망하였고 1864년에 오오우라 천주당이 건립됩니다. 프랑스인을 위해서 세워진 교회이기에 당시는 ‘프랑스절’이라고 불리고 있었습니다.
1865년, 오오우라 천주당 헌당식(獻堂式)이 거행되고 한 달 후, 역사적인 순간이 찾아옵니다. ‘스기모토 유리’를 비롯한 오오우라의 잠복 크리스천 15명이 천주당에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당내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던 프티장 신부에게 다가가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나의 가슴. 당신과 같소’ … 즉 크리스트교를 신앙하고 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엄혹한 금교령과 선교사가 없는 상황이 250년 간이나 이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이어져 있다는 것이 이 때 처음으로 외국인에게 확실히 알려진 것입니다. 프티장 신부는 매우 놀랐고 또 크게 기뻐하며 그들을 마리아 상 앞까지 이끌었습니다. 이 ‘신도발견의 마리아 상’은 현재도 오오우라 천주당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이 일은 세계의 카톨릭 관계자에게 전달됨과 함께 고토섬과 소토메의 잠복 크리스천에게도 구전되어 퍼져갑니다. 모두 ‘프랑스절의 견학’이라고 꾸미고 오오우라 천주당으로 향했고 예배를 올리거나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오오우라 천주당이라는 큰 정신적 지주를 얻은 우라카미의 신도들은 1867년에 ‘이제부터 장례식은 불교식이 아닌 크리스트교식으로 거행한다’라는 뜻의 구상서를 촌장에게 제출합니다. 깜짝 놀란 촌장은 나가사키 봉행소에 이를 신고하지만, 시대는 막부 말기의 혼란기 입니다. 봉행소는 섣부르게 크리스천을 박해하면 여러 외국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될 우려도 있었기에 신중하게 상황을 조사하게 됩니다. 그 결과 신자 68명이 포박되어 심한 고문을 받게 됩니다. ‘우라카미 네 번째 붕괴’라고 불리는 탄압사건의 발단 입니다.
그 후 메이지 유신에 의하여 일본은 새로운 정권으로 이행하게 됩니다만 메이지 정부는 신도국가를 표방하고 에도 막부와 같이 크리스천 탄압을 답습할 것을 확실히 천명합니다. 정부는 크리스천의 마을을 색출하여 뿌리를 뽑고자 하였습니다. 우라카미에서는 3천명 이상의 신자들이 귀양에 처해져 귀양처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습니다. 이 상황이 개선되는 것은 1873년에 이르러서 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국민에게 보장하지 않는 국가는 야만이다’라는 외국의 경멸이, 외국과의 평등한 조약을 맺음에 있어서 장해물이 된다는 것을 정부가 의식한 것입니다. 이리하여 겨우 크리스트교 금교령의 포고문이 철거되게 됩니다.
1879년 우라카미에는 작은 성당이 건설되었고, 그 후 타이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벽돌양식의 우라카미 천주당이 완성됩니다. 그러나 1945년 8월 9일, 우라카미에는 최대의 비극에 휩싸입니다. 우라카미 천주당의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것입니다. 다수의 카톨릭 신자들이 천주당에 모여 있던 시간에 원폭에 의한 열선으로 전원이 희생되었습니다. 일본의 문호를 개방 시켜 신앙의 자유의 계기를 제공하였던 나라들에 의해서, 교회의 상공에 원폭이 투하된 가슴이 찢어질듯한 비극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