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마의 영내에 자리하였던 일본 최초의 서양학교 세미나리오에서는 가려서 선발된 엘리트들이 외국인 교사 밑에서 라틴어, 고전, 음악 등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일본인 생도들이 유창한 라틴어로 발표나 토론을 하는 모습을 본 예수회의 준 관구장은 ‘내가 마치 코임브라(포르투갈)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며 놀랐다고 합니다.
1579년 일본으로 온 예수회의 순찰사 발리냐노는 일본 독자의 풍습이라는 장벽으로 인해 포교의 어려움을 통감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유럽의 문화를 강요하는 것이 아닌 일본 독자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포교활동을 이어가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그 일환으로서 아리마와 아즈치에 세미나리오(수도사 육성을 위한 초등교육기관)의 창립을 지시하였고, 일본 최초의 서양학교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1580년 히노에성에 창립된 아리마의 세미나리오에는 외국인 교사가 교편을 잡았고, 라틴어 등의 어학, 종교, 지리학 등 르네상스 시기의 서양학문이 조직적으로 교육되었다고 합니다.
최초 히노에성에 있었던 세미나리오도 히데요시의 ‘파드레이 추방령(선교사 추방령)’ 등의 영향을 받아 아리마 영내의 ‘하치라오’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하치라오에서는 포교의 수단 중 하나였던 회화나 판화교육이 중시되었고, 생도들에게도 매우 높은 수준의 기술이 전수되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로마에서 가져온 그림을 생도들에게 모작하도록 하면 어느 쪽이 진품인지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의 실력에 달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생도들은 라틴어를 습득하고, 라틴어로 발표회나 토론도 진행하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시찰한 예수회의 준 관구장은 너무도 유창한 언어실력에 ‘내가 마치 코임브라(포르투갈)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라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시의 생도들이 외국어로 토론이 가능한 수준이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그도 그럴 것이 교사로서 있던 선교사들은 거의 전원이 유럽의 대학에서 박사를 취득한 우수한 인재들이었습니다.
처음 22명의 생도로 출발한 세미나리오는 1595년에는 생도수가 70명에 달하여, 하치라오에서 ‘아리에’로 이전하였습니다. 히데요시의 금교령으로 인하여 나가사키로 이전하기도 했었지만, 1601년에는 다시 아리마 지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시기 부인을 병환으로 잃은 아리마 하루노부는 쿄토의 조정으로부터의 새 부인을 맞이하기 위하여 새로운 집을 짓고 있었지만, 하루노부는 이 집을 예수회에 기증합니다.
새로 지은 집은 그대로 세미나리오로서 사용되게 됩니다. 그 옆에는 ‘일본에서 가장 장엄’하다고 불리는 교회도 건설되었습니다. 당시, 히노에성보다 견고한 성이 필요하였기에, 새로운 하라성의 축성이 진행 중이었습니다만, 하루노부는 축성을 일시 중단하고 교회의 건설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하루노부가 크리스트교를 얼마나 중요시했었는지를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아리마의 영내에는 한 때 콜레조(현대의 대학에 해당하는 성직자를 육성하기 위한 고등교육기관)도 설치되었고, 각지에서 우수한 청년이 모여들어 성직자가 되기 위한 교육이 행하여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612년, 세미나리오는 다시 나가사키로 이전되고, 1614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금교령에 의하여 폐쇄되어 버립니다. 창립되고 30년 남짓이었습니다만, 이 세미나리오에서 배운 생도들은 그 후 금교의 일본에서 말 그대로 목숨을 건 크리스트교 포교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예수회에 있어서 일본에서 세미나리오를 창립하기 위해서는, 크리스트교를 보호하고 선교사의 안전을 보장해 줄 영주의 지역을 선택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크리스천 다이묘인 아리마 하루노부의 영지는 안전 보장에 가장 부합하는 곳이었고, 1580년 아츠지와 함께, 일본에서 처음으로 세미나리오가 아리마의 지역에 세워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