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난 이후, 막부에 의한 철저한 탄압으로 시마바라 반도 남부지역의 크리스천들은 뿌리부터 뽑혀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의 이주자들이 모여 들었고, 이 땅에 다시 신앙이 퍼져나간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코토섬과 나가사키, 아마쿠사 등의 크리스천은 선교사가 존재하지 않았던 금교의 시대에도 독자적으로 신도조직을 만들어 표면상으로는 불교신도처럼 꾸미고서 몰래 신앙을 계승하여 갑니다. 그 형태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랐습니다. 이번 제8화는 히라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히라도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포교했던 지역 입니다. 당시의 영주였던 마츠우라의 친척이 크리스트교 신자가 되었기에, 많은 백성들이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선교사와 불교신도의 싸움, 포르투갈 선원과 히라도 상인의 말싸움으로부터 사상자까지 나왔던 사건, 또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파드레이 추방령에 호응한 마츠우라의 정책 등, 다양한 문제와 마찰이 발생하면서도 신앙은 뿌리깊게 퍼져나갔습니다.
그러던 중에 히라도의 크리스천이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게 되는 사건이 1599년에 일어납니다. 마츠우라의 친척이자 히라도의 신앙을 비호하고 있었던 ‘코테다’의 일족 약 600명이 나가사키로 추방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이후 히라도의 신자들은 버팀목을 잃고, 수난의 시대에 빠지게 됩니다.
히라도의 각지에서는 지독한 단속으로 인하여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순교하였습니다. 히라도 섬의 아름다운 해안인 네시코 하마에 위치한 ‘쇼우텐세키(승천석)’라는 작은 바위는 당시의 순교의 이야기들을 전해주는 상징 중 하나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작은 바위에서 처형되었다고 전해지고 있고, ‘순교자들은 이 작은 바위로부터 천국으로 여행’을 떠났다며 성지로서 모셔지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히라도에는 신자의 순교에 얽힌 성지가 몇 군데나 있습니다. 신앙이 강하게 스며들어 있던 이키츠키 섬의 신자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성지는 섬의 동쪽에 떠 있는 무인도, 나카에노 섬 입니다.
1613년의 게이초의 금교령으로 선교사는 모두 국외로 추방되었습니다만, 그 후에도 일본에 잠입하여 포교를 시도한 선교사는 많이 있었습니다. 카미로 콘스탄조 신부는 그 중 한 명으로, 1622년에 몰래 잠입하여 히라도와 이키츠키 섬에서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부는 곧 붙잡혀서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그 후 신부에게 도움을 주었던 이키츠키 섬의 신자들도 붙잡혀 버리게 됩니다. 그들은 나카에노 섬에서 처형되게 되었고, 처형장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는 찬송가를 부르면서 스스로 노를 저었던 자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순교하게 되면 천국에 가게 된다는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외에도 함께 승천할 수 있도록 어린 형제 3명을 한 쌀 가마 속에 집어 넣고 묶어서 바다에 던져 넣은 이야기 등 여러 가지 순교의 이야기들이 전승되어 오고 있습니다.
히라도에서 최후의 순교가 있었던 것은 1645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해 이후는 ‘종문개 정책(종교식별 및 개종 정책)’이 시행되었고, 정기적인 ‘에부미(그리스도 마리아상 등을 새긴 널쪽을 밟게 하는 사상 조사 작업)’를 통하여 백성들의 종교가 엄격히 관리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크리스천들은 겉으로만 개종하여 불교 신도로서 꾸미고, 몰래 숨어서 신앙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물밑에서 유지되어 온 신앙의 형태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양상이 다릅니다. 히라도에서의 특징적인 형태로는 ‘난도가미(창고신) 신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방에는 전통적인 신단과 제사 불단을 갖추어 보통의 집과 다름없게 꾸며놓으면서도, 집의 구석의 창고에 크리스천 제구들을 갖추어 두고, 몰래 신앙 생활을 하는 방책이었습니다.
이외에도 구상화된 데우스의 모습을 그린 족자나 그리스도와 마리아, 성인 등의 인물화를 ‘야마토화풍’으로 그린 것이 잠복시대의 신앙 대상이 되었습니다. 신도조직은 외부로부터 발견되지 않도록 지하화되어 운영되게 됩니다.
선교사가 없는 와중에의 신앙계승은 나침반 없이 배를 움직이는 것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금교 이전에 신자들이 교회에서 열심히 익혔던 교의나 기도는 ‘오라쇼’라고 불리는 주문과 노래의 형태로 계승되어 가게 됩니다.
이 오라쇼도 지역에 따라 독자적으로 변화되어, 그 중에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행하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교의를 전하는 선교사가 없는 상태에서는 내용의 이해가 동반되지 않는 형태인 단순 암기나 구전으로서 계승 되었기 때문에 점차 본래의 교의에서 변용되어, 독자의 신앙형태로 변해갔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변화를 거듭하면서도 그것들은 부모에서 자녀에게로 끊이지 않고 명맥이 이어져 내려옵니다. 1873년에 크리스트교 금지의 포고문이 철거될 때까지 거의 250년 간, 신앙은 그렇게 은밀히 계승되어 온 것입니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의 크리스트교 금지 포고철폐 이 후 잠복 크리스천들은 신앙을 표명하고 카톨릭으로 돌아가는 사람들과, 지금까지의 잠복 크리스천으로서의 신앙형태를 지키는 ‘카쿠레 크리스천(숨은 크리스천)’으로 나누어 집니다.
왜 금교가 철회되었음에도 계속해서 숨어서 신앙생활을 이어가야 했는지에 관해서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던 듯 합니다. 선조 대대의 전통형태를 계승해 나가는 것이야 말로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 또는 지금까지 이어온 관습을 포기하면 벌을 받을 것이다라는 두려움 등, 단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배경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히라도의 이키츠키 섬과 네시코는 카쿠레 크리스천의 고향으로서 알려져 있습니다만, 오랜 시간에 걸친 신앙 형태의 변화와 망각, 그리고 계승자의 부재로 인하여 예전의 조직과 전승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 기억을 기록하여 남길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