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7년, 공물을 납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구치노츠 촌장의 임신 중이던 부인이 지방관리에게 살해된 것을 계기로, 시마바라 반도와 아마쿠사의 백성들이 잇따라 봉기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들의 총대장은 겨우 15~16세의 소년이었던 ‘아마쿠사 시로’ 였습니다.
막부는 처음에 이를 단순한 농민봉기에 지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전의 아리마 가문과 고니시 가문 등의 크리스천 다이묘의 가신들이었던 귀농무사들이 지휘하는 봉기세력은 본격적으로 무장, 조직화되었고 사태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흉작에 더해 마츠쿠라 가문의 가혹한 공물 징수에 의하여, 시마바라 반도에서는 수 많은 아사자들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다음해 모내기에 써야 할 볍씨마저 전부 빼앗겼다고 합니다. 예전 아리마 가문을 섬기다 무사의 지위를 버리고 시마바라 반도에 남은 귀농무사들은 ‘이 참상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이라며 암암리에 서로 이야기를 이어가게 됩니다.
고난한 상황에 빠져 있던 것은 시마바라 반도의 백성들뿐 만이 아니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크리스천 다이묘 고니시 유키나가를 대신해서 카라츠 영주를 맡은 ‘테라자와 히로타카’가 지배하고 있던 아마쿠사의 백성들도 무거운 공물과 신앙의 금지에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마쿠사에서는 선교사가 남긴 ‘천재지변이 일어나 사람들이 멸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16세의 하늘의 아이가 나타나, 크리스트교의 가르침을 믿는 이들을 구할 것이다’라는 예언이 주목을 받게 됩니다. 고시니 유키나가의 가신이었던 크리스천 낭인들은 그 예언에 호응하여 결속하게 됩니다.
시마바라반도의 귀농무사들, 그리고 아마쿠사의 크리스천 낭인들이 모인 것은 양 지역의 사이에 있는 섬, 유시마 였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뜻을 함께 하고, 무장봉기를 도모하게 됩니다.
유시마에서 봉기의 계획이 세워지고 있던 중 백성들의 분노가 폭발하게 되는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공물을 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쿠치노츠의 촌장의 임신 중이던 부인이 지방관에 의하여 살해된 것입니다. 아기를 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강물 속 상자에 가두어, 어머니와 아기가 함께 목숨을 잃어버린 너무도 잔혹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시마바라 반도와 아마쿠사의 백성들은 잇달아 봉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총대장이 된 인물은 겨우 15~16세의 소년, ‘아마쿠사 시로’ 였습니다. 그야 말로 아마쿠사에 남겨진 선교사들의 예언에 나오는 ‘하늘의 아이’라고 사람들은 믿었고, 크리스천들은 스스로의 신앙을 표명하며, 영주에 맞서기 시작했습니다.
시마바라 반도에서는 마츠쿠라 가문의 성이었던 시마바라성이, 그리고 아마쿠사에서는 토미오카성이 봉기한 백성들에 의하여 포위 공격을 받게 됩니다. 예전의 무사였던 이들의 지휘로 민중은 무장화, 조직화되어 단순한 농민봉기를 넘어서는 본격적인 전쟁으로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엄청난 기세를 자랑하던 봉기군이었지만, 하라성도 토미오카성도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아마쿠사의 봉기군은 바다를 건너 시마바라 반도의 봉기군과 합류하게 됩니다. 그 수 약 3만 7천. 그들은 전투를 수행하는 남성뿐 만이 아니라 여성과 아이들까지 포함한 대 집단을 이끌고 하라성터에 들어가 농성을 시작하게 됩니다. ‘여기서 기다리다 보면 포루투칼 배가 도와주러 올 것이다.’ … 그 옛날 류조우지 가문을 격퇴하였던 예수회의 대포에 대한 이야기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겠지요. 봉기군은 그러한 바람 속에서 결속하여, 조직적인 농성생활을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농민봉기에 불과하다 생각했던 막부였지만, 심각해져가는 사태를 엄중히 보고 규슈의 다이묘들에게 이를 토벌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리하여 시마바라 반도에 집결한 토벌군은 최종적으로 12만여의 대군에 이르게 됩니다. 막부군은 하라성 터를 포위하고 식량을 끊는 병참압박 작전에 들어가고, 몇 번에 걸쳐 하라성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각 제후들의 통제가 충분히 이루어지지도 않았을 뿐 더러, 아무리 폐성이라고 하더라도 그 옛날 아리마 하루노부가 세운 하라성의 견고함도 더해져, 막부군의 공격은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았습니다. 봉기군의 농성은 3개월에 이르게 됩니다.
병참압박이 이어지고, 하라성내의 탄약과 식량은 거의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봉기군은 하라성의 깎아지른 절벽을 따라 바다까지 내려가, 해초를 캐서 식량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막부측의 지휘자 ‘마츠다이라 노부츠나’는 성 밖으로 공격을 해온 봉기군의 시체 속에서 해초 밖에 나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성 내에 더 이상 식량이 남아있지 않다고 확신하고 1638년 4월 12일을 총공격의 날로 결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전날 공을 세우고 싶었던 다이묘들이 경쟁적으로 서로를 속이거나 몰래 진군을 하거나 하는 바람에 지지부진한 형태로 공격이 시작됩니다.
탄약도 식량도 바닥에 달한 봉기군에게 12만여의 막부군이 덮쳐 들어 왔습니다. 하라성은 하루 만에 함락되었고 아마쿠사 시로를 비롯하여 농성을 하던 민중의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막부군에 의하여 철저하게 파괴, 살해 되었었던 것입니다.
최근의 하라성 터의 발굴조사에서는 칼로 베인 상처 자국이 있는 인골, 유골의 입 주변의 마리아 메달, 납을 녹여 만든 것 같은 십자가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하라성 터에서 발견된 이러한 출토품은 전투의 장렬함과 농성하고 있던 사람들의 신앙심을 오늘날에 전해주고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흔적을 일체 남기지 않는다’ … 하라성 터의 잔존물로부터 이러한 막부의 대응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성으로서의 기능을 다시 할 수 없도록, 망루의 기반들이 거의 다 뜯어져 나갔습니다. 또한 남아있던 건조물들도 소각하여 파괴된 석단에 묻어버리는 등 성은 철저히 처분되어 버립니다.
시마바라 번주 마츠쿠라 카츠이에는 이 난의 책임이 물어져 면직되고, 후에 참수되게 됩니다. 민중이 전멸해 버린 시마바라 반도의 남부에는 전국 각지로부터 이주자가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1639년, 막부가 포르투갈선의 입항을 금지하자 일본은 긴 쇄국의 시대에 돌입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