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발굴조사가 진행중인 히노에성 유적. 출토된 금박기와나 중국의 도자기 등으로부터, 몇몇 문헌에서 나오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히노에성의 모습이 점차 드러나고 있습니다.
겨우 4만석의 다이묘에 불과하였던 아리마 하루노부는 어떻게 히노에성의 개축과 하라성의 축조를 할 수 있었을까? 그 배경에서 하루노부의 해외교역이나 크리스트교와의 밀접한 관계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1590년 10월 12일의 예수회 일본연보에서, 귀국한 천정견구소년사절과 발리냐노를 히노에성으로 맞아들였을 당시의 성내의 모습을 루이스 프로이스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 ‘이 건물의 아름답고 우아한 풍취를 일행들은 마음에 들어 했다. 크고 작은 방들은 모두 황금으로 만든 물건들과 우아하고 화려한 회화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 저택은 최근, 아리마 하루노부에 의하여 지어졌으며 훌륭한 솜씨로 만들어진 성곽 안에 있다. 그 성곽을 본 포르투갈인들 중 일본에 이 정도로 웅장하고 수려한 건조물이 있다고는 생각해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프로이스는 이전에 아즈치성에서 오다 노부나가를 알현한 적도 있는 인물입니다. 그 프로이스가 이렇게 까지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에서부터, 당시의 히노에성이 얼마나 멋진 성이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프로이스의 설명뿐 만이 아니라 최근의 발굴조사에 의해서도 히노에성의 지난날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앞서 설명하였던 금박기와에 더하여 1996년부터 1999년의 조사에서는 성의 정면 출입구에서 외성곽을 향하는 직선형태의 계단을 발견하였습니다. 조사 성과에 의하면 이 계단은 연장 70m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또한 계단의 직선 형태 구조는 오다 노부나가가 축조한 코마키야마성이나 아즈치성과도 유사성이 있는 것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리고 히노에성에서는 ‘호우카(法花)’라고 불리는 중국의 도자기도 출토되고 있습니다. 이 도자기들은 짙은 감색과 옥빛의 문양을 새겨 넣는 기법과, 내측에 바르는 녹색의 유약이 특징입니다. 일본 각지의 발굴 조사에서 있어서 이러한 출토사례는 아주 희소한 것으로 아리마의 해외교역의 위상을 나타내는 사료로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오사카 나카츠의 남만문화관에는 매우 아름다운 황금 십자가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1951년에 하라성 혼마루 터에서 발굴된 것으로 가로 3.2m, 세로 4.8m의 크기에 정교한 세공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이 십자가가 어디에서 왔는지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예수회의 일본연보에는 ‘로마교황이 천정견구소년사절을 통하여 아리마 하루노부에게 황금 십자가를 선사했다’라는 보고도 있습니다.
히노에성의 성주인 아리마 하루노부의 목에는 눈부시게 아름답게 빛나는 황금 십자가가 걸려 있었습니다.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금박기와와 프로이스의 ‘크고 작은 방들은 모두 황금으로 만든 물건들과 우아하고 화려한 회화들로 장식되어 있었다’라는 기록으로부터 그 옛날 히노에성의 모습은 오늘날의 우리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호화찬란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히노에성터의 남아 있는 건조물들로부터 불교배척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루노부는 크리스트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면서 불교사원의 파괴도 함께 시행하였습니다. 발리냐노가 구치노츠에 머무르고 있던 단 3개월 동안에 40곳이 넘는 영내의 절과 신사가 파괴되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외 성벽의 북측에서 발견된 계단의 디딤돌에는 불탑의 일부분이 다수 사용되었는데, 그 형태나 금박등의 흔적으로 보아 절이나 신사를 파괴할 때 함께 철거된 불탑이 곧바로 계단의 디딤돌로서 히노에성에 반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스페인 무역상인 ‘아비라 히론’은 1595년의 히노에성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 ‘큰 방의 여닫이 문들은 스무 개로, 그 안쪽에는 또 아름다운 넓은 방이, 그리고 또 아름다운 문들이 이어졌다. 이 방에서는 바다가 보였다.’ … 이 문의 맹장지에는 금빛과 연한 청색의 장미 모양의 꽃들, 산과 여름 경치 속에 매, 작은 새 사슴 등이 그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호화로운 맹장지문을 계속해서 열며 나아가다 그 끝에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아마쿠사 여울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고 합니다. 미나미시마바라에서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이 풍경이 400년 전에 이미 유럽에 전해졌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