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타나와테에서의 승리, 그리고 히데요시가 행한 큐슈분할로 시마바라반도의 지배권을 인정 받은 아리마 하루노부는 번영의 절정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난 후, 천하를 손에 넣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대가 도래하였고, 이에야스의 명령을 받은 하루노부가 포르투갈의 선박을 격침시키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로 인하여 하루노부와 예수회와의 관계가 악화되고 맙니다.
이에야스는 하루노부의 공을 칭송하였지만, 구영토의 회복을 기도하던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이 발각되어 하루노부는 카이국에 유배된 후 참수되었습니다. 그 후 시마바라반도는 ‘마츠쿠라 시게마사’ 에 의하여 통치되게 되었습니다. 시게마사는 히노에성을 대신하여 시마바라성의 축성을 개시하였고, 영내의 백성들에게 막대한 공물과 노동을 부과하였습니다. 나아가 막부로부터의 명이었던 크리스천 탄압도 더욱 심해지게 되고, 이는 이후 비극의 발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하루노부는 임진왜란 중 배운 축성기술을 살려, 약 5년에 걸친 하라성의 축성에 착수하였습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절벽 위라는 지리적 이점을 살린, 아주 견고하고 아름다운 성이 완성되었습니다. 에도시대에 들어서는 남만무역에 더하여 주인선무역(일본의 정부허가 국외무역)도 개시하여, 더욱 많은 이익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아들인 나오즈미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증손녀와 결혼함으로써, 아리마의 영지는 안정된 번영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1608년, 어떤 사건이 벌어집니다. 마카오에서 하루노부의 주인선과 포르투갈의 선박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로인해 일본측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하루노부는 이에야스에게 보복 허가를 얻어 나가사키항 밖에서 포르투갈 선박을 습격해 침몰시켜버립니다. 그 결과, 남만무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예수회와의 관계가 악화되고 맙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하루노부가 몰락하게 되는 대사건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포르투갈 선박에의 보복이 성공한 것을 전해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하루노부를 크게 칭찬합니다. 그러나 막부의 측목부(막부의 벼슬)였던 오카모토 다이하치가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하루노부를 부추겼습니다. … ‘이번의 보상으로서, 예전부터 아리마의 영지였던 토지를 되찾을 수 있도록, 제가 처리하도록 하지요.’… 오래 전부터 류조우지 가문과의 싸움 등으로 인하여 잃었던 영토를 되찾기를 갈망하고 있었던 하루노부는 이러한 부추김에 넘어가고 맙니다. 다이하치는 처리를 위한 자금을 하루노부에게 요구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가짜 주인장을 하루노부에게 넘겨주는 등 배임행위도 계속됩니다.
이러한 사실이 이에야스의 귀에 들어가자 오카모토 다이하치는 붙잡혀 화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하루노부는 ‘옛 영지의 회복을 꾀하였다’라며 책임이 물어졌고, 카이국으로 유배됩니다. 그 후 하루노부는 자결을 명 받게 됩니다. 그러나 크리스트교에서는 자해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할복을 거부하고, 부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부하에게 목을 치도록 하였습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신앙을 관철하며 하루노부는 45년간의 생애를 마감하게 됩니다. 1612년의 일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크리스트교를 위험하다고 느낀 이에야스는 ‘게이쵸의 금교령’을 반포하게 됩니다. 지금까지도 크리스트교의 포교는 금지되어 있는 상태였지만 막부가 직접적으로 신자를 탄압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금교령은 무사계급뿐만이 아니라 서민까지도 크리스트교로부터 개종을 하도록 강요하고, 이를 거부하는 이들을 처벌하는 엄격한 것이었습니다.
하루노부의 아들 아리마 나오즈미는 이에야스의 측근이었기에, 아버지가 자결을 명 받았지만 가독과 영지의 지배권을 상속받는 것은 인정되었습니다. 상속을 받은 나오즈미는 그 즉시 크리스트교를 포기하고 크리스트교 탄압으로 돌아섰습니다. 영내의 선교사를 추방하고 교회의 철거를 명했습니다. 그리고 백성에게도 크리스트교에서 개종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만, 각지에서 콘프라리아(Confraria)라고 불리는 신도 조직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고, 크리스트교 배척은 생각만큼 진전되지 못했습니다. ‘이대로는 막부로부터 괜한 의심을 받게 되지 않을까?’ … 나오즈미는 탄압을 더욱 철저히 하고, 아버지와 후처 사이에서 태어난 배다른 형제들을 살해하기에 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나오즈미는 그러한 자신의 행위와 양심의 갈등 속에서 점차 인내심을 잃어갑니다. 지긋지긋해진 나오즈미는 막부에 자신의 국가를 바꿔줄 것을 요구하였고, 1614년에 휴가 노베오카로 옮겨가게 됩니다. 이 때, 나오즈미를 따르지 않고 무사의 신분을 버리고서 서민이 되어 지역에 남은 가신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버리지 않고 시마바라 반도에 남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나오즈미가 떠난 후, 아리마의 영지는 ‘천영(막부 직할 영지)’이 되었습니다만, 1616년에 나라의 야마토고죠로부터 ‘마츠쿠라 시게마사’가 히노에성에 입성하게 됩니다. 후에 선교사들이 ‘악마’라고 부르게 되는 인물입니다. 1618년, 시게마사는 새로운 거점으로서 시마바라성의 축성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 때 히노에성과 하라성은 ‘일국일성령(한 국가에 하나의 성만을 인정하는 법)’에 따라 폐성 됩니다. 약 7년의 세월을 들여 세워진 시마바라성은 4만석 규모의 다이묘의 성으로서는 거대하고 사치스러운 성이었습니다만, 에도성 개축의 공사담당을 맡고 나서는 등 마츠쿠라 시게마사는 막부에 대한 충성을 보이는 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츠쿠라 시게마사의 행동은 재정을 궁핍하게 만들어 농민들은 과중한 공물에 괴로워하게 되었습니다. 시마바라 반도에는 괴롭고 어두운 분위기가 서려 있었습니다.
1620년, 일본에 잠입하려고 했던 선교사 2명이 한 척의 주인선에 타고 있던 것이 발각되었습니다. 막부의 크리스천에 대한 불신감은 더더욱 높아지고, 대규모의 탄압이 시작됩니다. 마츠쿠라 시게마사도 이 탄압에 호응하여 영내에서의 크리스천 탄압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미츠로부터 크리스천에 대한 대응이 미온적이라며 질책을 받게 되자 시게마사의 탄압은 점점 더 과격하게 변하여 가고, 크리스트교를 버리지 않는 백성의 손가락을 자르거나, 낙인을 찍는 등 잔혹한 고문을 자행하기에 이릅니다. 네덜란드 상관장(외국인이 영업을 하는 상점)의 기록에는, 시게마사가 크리스천이나 공물을 납부하지 않는 농민에 대하여 운젠지옥 열탕을 이용하여 고문과 사형을 행했다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마츠쿠라 시게마사는 막부로부터의 금교강화의 지시에 따라 탄압을 행하고 있었지만, 1630년, 오바마온천에서 급사하고 맙니다. 사인이 명확치 않았기에 크리스천들 사이에서는 천벌이 내려졌다고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리고 뒤를 이은 아들 마츠쿠라 카츠이에 이르자 이번에는 기근과 천재지변까지 시마바라 반도를 덮쳤습니다. 이전 아리마 가문의 가신이었던 귀농무사들 중에 크리스천으로 다시 복귀하는 이들도 나타나기 시작하여 봉기의 기회를 엿보기 시작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