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다이묘로서 알려진 아리마 히로노부입니다만, 처음에는 아버지 아리마 요시사다가 세웠던 교회를 파괴하는 등, 크리스트교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하루노부는 영토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세례를 받고, 점차 마음에서부터 독실한 크리스트교 신자가 되어갔습니다.
또한 해외 교역을 통하여 세계로부터의 폭넓은 정보를 얻고 있던 하루노부는 일본에서도 얼마 되지 않는 국제적인 시야를 가진 인물이었고, 예수회와 선교사들로부터도 중요시 되었던 인물 이었습니다. 크리스천 다이묘 아리마 하루노부의 반생을 따라가 봅시다.
1571년, 형 아리마 요시즈미가 세상을 떠나면서, 하루노부는 겨우 4살의 나이로 아리마 가문의 가독을 이어받게 됩니다. 지금은 열렬한 크리천 다이묘로서 알려져 있는 하루노부 이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세례를 받았던 아버지 요시사다가 병으로 몸져 누워 선교사를 만나고 싶다고 부탁했었을 때, 하루노부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사후에는 교회와 십자가 등을 파괴했습니다. 초기의 하루노부는 크리스트교와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가의 류조우지 타카노부의 세력이 점점 강해져 아리마의 영지를 위협할 정도가 되자 하루노부는 태도를 급선회하여 선교사와 예수회의 지원을 요청하게 됩니다. 발리냐노가 1579년에 쿠치노츠에 상륙하고 이듬해에는 자진해서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됩니다. 이 때 하루노부의 나이 13세 였습니다. 아직 어린 하루노부가 류조우지 가문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 경제력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예수회로부터 지원을 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루노부는 그 뿐만 아니라, 역시 류조우지 가문과 대립하고 있던 시마즈 가문에도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루노부는 예수회와 시마즈 가문의 지원을 등에 엎고 류조우지 가문에 대항하게 됩니다. 1584년 3월, 이윽고 류조우지 타카노부는 수 만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시마바라 반도 북부에서부터 침공을 시작했습니다. 이를 요격하기 위해 출진한 아리마-시마즈 연합군은 고작 6~8천 정도. 양군은 오키타나와테(현재의 시마바라시 키나몬마치 부근)에서 대치하며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이 때 예수회가 하루노부에게 제공했던 대포가 엄청난 위력을 뽐냈다고 전해집니다. 병력의 숫자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가 있어 압도적으로 불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리마-시마즈 연합군은 타카노부를 무찌르게 됩니다.
하루노부는 이 승리의 보답으로서 당시 영지로서 통치하고 있던 나가사키 우라카미 지역을 예수회에 기증하였습니다. 우라카미 지역은 이미 크리스트교의 포교활동이 진행되고 있던 곳이었지만, 이 기증을 계기로 하여 한층 더 크리스트교가 견고히 자리잡게 됩니다.
아리마 가문과 하루노부는 류조우지 가문의 위협으로부터는 벗어났지만, 이번에는 지원군이었던 시마즈 가문과 예수회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예수회는 당초 우라카미가 아닌 운젠지역을 보상으로서 기증해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만, 시마즈 가문이 이를 강하게 반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시마즈 가문과 그들의 국가였던 사츠마국은 불교에 귀의해 있었고 본디 불교수행자들의 신성한 산이었던 운젠지역에 사찰과 불상이 재건되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운젠은 화약의 원료가 되는 유황의 산지이기도 하였기에, 운젠지역이 외국인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두려워했다고도 추측됩니다. 그 외에도 시마즈 가문은 이따금 ‘크리스트교 신앙을 버리도록’ 하루노부에게 권고하였다고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크리스천으로서 이후에 히고-우토성의 성주가 되는 ‘고니시 유키나가’는 영지인 쇼우도섬에 사제를 초청하여 크리스트교 포교활동을 진행하는 한편,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다이묘들을 중재하는 역할도 맡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시마즈 가문이 항복하여 큐슈가 평정된 이후에 행해진 큐슈지역 분할에 있어서 하루노부는 시마바라 반도의 소유권을 인정받게 되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히고-우토성을 본거지로서 아마쿠사까지 지배하게 됩니다. 이 시기 아마쿠사에는 인구의 대부분이 크리스천이었다고 합니다. 후에 견구사절의 4명의 소년도 수학하게 되는 장소인 콜레조와 노비시아도(수련원)도 아마쿠사에 설립되게 됩니다. 유키나가는 이 아마쿠사에서의 예수회의 활동을 보호하고 지원하였습니다.
돌이켜보면 류조우지 가문과의 싸움에서도, 큐슈평정 때에도, 하루노부를 지탱하고 있었던 것은 크리스트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국시대의 어지럽게 변하는 정세 속에서 하루노부는 크리스트교 신앙을 통하여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은 영토를 지키기 위하여 세례를 받았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하루노부의 신앙은 점점 더 강인해져 갑니다. 큐슈평정 이후인 1587년 7월, 히데요시는 파드레이 추방령을 내리지만, 하루노부는 곤경에 빠진 선교사와 세미나리오를 영내에 받아들이고 보호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