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토열도의 북쪽, 오지카섬의 동쪽에 노자키섬이라는 섬이 있습니다. 현재 이 섬은 거의 무인상태입니다만 예전에는 3개의 마을에 6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3곳의 마을 중 ‘노쿠비’와 ‘후나모리’는 에도시대 후기에 잠복 크리스천들이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 입니다. 이 마을들은 급경사에다가 결코 비옥하다고 할 수 없는 토지를 개간해야만 하는 등, 너무도 혹독한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 마을이었습니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 금교령이 해제되자 마을의 주민은 돈을 모아 교회당을 건설 했습니다. 가까스로 완성시킨 마을의 교회,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내버려지고 다시 무인도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쫓아봅니다.
노쿠비 지역은 1716년, 고래 잡이로 부를 이룬 오지카섬의 거상과 지주들이 개척을 시작한 것이 그 출발입니다만, 이곳에는 오랜 기간 사람은 살지 않았던 듯 합니다. 평지가 얼마 없고 급경사뿐이며, 살기에는 불편한 토지였던 것입니다.
그 후, 1797년에 고토 번은 오오무라 번에에게 백성들을 토지개척민으로서 이주 시키도록 요청합니다. 오오무라 번주는 이를 쾌히 승낙하고, 소토메지방으로부터 100명 정도를 고토섬에 이주시킵니다. 그 대부분이 잠복 크리스천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개척지가 주어졌다는 것이 알려지자 더욱 이주자는 늘어났고, 최종적으로는 3000명을 넘는 사람들이 고토로 넘어 갔다고 전해집니다.
이 중에 2 가족이 시모고토를 경유해서 노자키섬에 건너가, 노쿠비 지역에 살게 된 것이 노쿠비 마을의 시작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노쿠비의 사람들은 급경사를 고생하여 개간하면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떨어져 있는 이 땅에서 몰래 신앙을 계승하며 반세기 이상이 흘러갈 즈음, 나가사키로부터 큰 소식이 날아듭니다. 1865년, 프랑스인을 위해서 세워진 나가사키의 오오우라 천주당에서 우라카미의 잠복 크리스천과 신부가 만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에 감동한 노자키섬의 잠복 크리스천들도 오오우라 천주당의 신부들과 연락을 취하여 1867년에는 6명이 오오우라 천주당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 때는 크리스천 금교가 이어지고 있던 시대입니다. 이 사실이 오지카의 관리들에게 알려지자 노자키섬의 크리스천 약 50명 전원이 히라도에 연행되어, 개종을 강요당하며 고문을 받게 되고 맙니다.
고문을 견디지 못해 섬의 주민들은 모두 개종을 하겠다고 합니다. 겨우 노자키섬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황폐화된 마을과 살림살이라고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참담한 현실이었습니다. 시대는 메이지 시대에 접어들고도 수년이 지났지만 크리스천에 대한 박해는 뿌리 깊게 남아있었습니다. 박해에서 해방된 것은 1873년의 크리스트교 금교령 포고문 철거까지의 기나긴 기다림 뒤였습니다.
1882년, 노쿠비 마을에 목조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간신히 가지게 된 신앙의 지주였습니다. 그 후 1907년에는 신도 세대 18호가 결속해서 본격적으로 벽돌건축의 교회당을 건설할 계획을 세웁니다.
설계와 시공은 ‘테츠카와 요스케’에게 의뢰되었습니다. 신자들은 건설비를 마련하기 위해 식사를 줄이고, 직접 건설자재를 옮기는 등 가난하였지만 마음을 하나로 모아 교회당의 완성을 목표로 하여 나아갔습니다. 건설에 참여한 장인들은 신자들의 생활을 보고 ‘이 사람들은 건설비 3천 엔을 지불 할 수 있을까’라며 걱정했다고 합니다.
마을 전체가 큰 고생 끝에 1908년 10월 드디어 비원의 노쿠비 교회당이 완성되고, 사제로부터 축별 되었습니다. 언덕 위에 푸른 바다를 향하여 세워진 교회당은 자그마하면서도 너무도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노자키섬의 또 하나의 크리스천 마을, 후나모리의 시작은 1840년경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기 오지카섬의 도매상인이었던 ‘타구치 토쿠히라오사무’가 오오무라 번의 소토메를 방문하였을 때 슬퍼 보이는 3명의 남자들을 해안에서 만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다가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들은 잠복 크리스천들로 내일 처형될 운명이라는 것. 토쿠히라오사무는 이를 불씽히 여겨 그들을 배에 숨겨 오지카로 데리고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출항을 할 때 관리의 검문 등 위기도 있었지만, 어찌어찌 오지카까지 데리고 오는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 무인도였던 노자키섬의 후나모리에 살도록 하고, 이들을 고용하여 일을 맡겼다고 합니다.
그 이후, 히사카섬과 나루섬 등으로부터도 크리스천의 이주자들이 찾아와, 가장 많을 때에는 150명을 넘어서는 마을이 되었습니다. 1882년에는 목조의 교회도 세워지고, 조용한 기도의 나날이 이어지게 됩니다.
전후 일본이 고도경제성장을 이루던 중, 노자키섬의 주민은 점점 줄어들어 가게 됩니다. 취학과 취업으로 섬을 떠난 젊은이들이 돌아오지 않게 된 것입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에는 34호 규모였던 후나모리 마을은 1965년에는 13호까지 줄어들고, 이듬해에는 집단이촌으로 모두 오지카섬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노쿠비마을의 경우는 1950년에 28호 171명 이었던 주민이, 1970년에 6호 28명까지 급감하고, 이듬해에 집단이촌으로 후쿠오카와 키타큐슈로 모두 이주하게 됩니다.
수 십 년에 걸쳐 잠복하여 신앙을 지켜오고 떳떳하게 교회를 세워 한세기 가까이를 이어온 노쿠비와 후나모리는 다시 무인도로 되돌아 간 것입니다. 현재의 노쿠비 마을은 목조 가옥들이 낡아 스러져 가고, 노쿠비 교회당만이 남아 그 모습이 너무도 쓸쓸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본래는 사람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토지에 은밀히 신앙을 계승하기 위하여 이주하여 온 것이 마을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를 감안하면 일본이 드디어 근대화 되고 신앙과 거주지의 자유가 보장됨에 따라 숨어있기 위한 땅으로서의 노쿠비와 후나모리의 역할은 끝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